21-12-12_창26(12-25)_믿고 순종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Dec 12, 2021
- 8 min read
이삭은 그가 살고 있던 브엘라해로이에(창 25:11)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그 흉년이 지날 때까지 그랄 땅에 머물기 위해 그리고 옮겨 갔습니다. 그곳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평화조약을 맺은 아비멜렉 왕의 아들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은 그가 자기를 돕고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아비멜렉 2 세는 이삭을 환영했고, 그랄에서 안전한 가운데 오랫동안 살 수 있도록 보호해주었습니다 (창 26:8, 11).
사실 이삭이 그랄 땅에 오랫동안 머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삭이 처음 그랄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명하신 것과 약속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제일 먼저 명령하신 것이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고 하신 것을 보니까, 아마도 이삭은, 처음부터 그랄 땅에 오랫동안 머물 생각이 아니고, 그 곳에서는 잠시만 있다가 조만 간에 더 풍요롭고 기름진 이집트로 내려가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그가 가나안 땅에 찾아온 심한 기근을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막지 않고 허락하셨는데, 이삭에게는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왜 이집트로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것은, 이삭이 하나님이 그에게 살라고 한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하나님께서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복을 이삭과 그 후손에게 이루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삭이 더 살기 좋은 이집트로 가고 싶은 마음을 접고,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서 살면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3절 상)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3절 중). . .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4절 중)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3절 하 - 4절 상)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4절 하)
위에서 2 번, 3 번, 4 번은 이삭이 죽은 후, 먼 장래에 이루어질 것들이지만, 1 번의 약속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주께서 지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지켜 주신 증거들을 기록한 것이 바로 창세기 26장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이집트로 내려가려 했던 마음을 완전히 접고, 가나안 땅이었던 그랄에 머물렀던 겁니다. 그러나, 이삭은 주님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그랄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자기 아내를 빼앗아 갈 것 같아 불안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아내를 빼앗기더라도 자기 목숨은 건질 수 있기 위해서, 아내를 자기 누이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랄 남자들이 이삭에게 리브가가 누구냐 고 묻기만 했지, 누이 동생이라는 데도 장가들겠다고 하는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와 그 가족을 보살피고 지켜 주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비록 이삭이 그가 가나안 땅에 머물면 그를 보살펴 주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해서 자신의 방법으로 자기 생명을 보호해 보려고 한 것은 불신적이고 어리석고 미숙한 믿음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이집트로 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서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그대로 순종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을 지켜 주신 것이고, 그래서 이삭이 상당히 오랫동안 그랄 땅에 머물고 있었어도, 아무도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거나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새로운 법을 세워서 이삭과 리브가의 안전을 지켜주었습니다 (창 26:11).
비록 현실적으로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과 명령은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이삭이 경우가 증명해줍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오히려 흔들리던 마음과 연약했던 믿음이 담대함과 확신을 더 얻게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창세기 26:12-25) 확인할 수 있습니다.
12절은, 이삭이 그랄 땅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놀랍게도 씨를 뿌린 그 해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가장 기름진 지역이라도 뿌린 것의 25 배 내지 50 배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없다고 합니다 (Keil & Delitzsch, p. 271). 이런 땅에서 백 배의 수확을 거두었다는 것은, 인간은 해 낼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12절 마지막 문장이 이를 말해줍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주님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고, 하나님이 살라고 하신 가나안 땅에 머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께서 이삭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보살피고, 복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3절).
또 “백 배의 수확을 거두었다” 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켜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 외에도, 중요한 사실 한 가지다 더 있습니다. 사실, 심은 것의 25 배 또는 50 배만 거둘 수 있어도, 이삭은 가족들과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을 겁니다만, 그 넉넉함의 배를 더 얻었으니, 차고도 넘치고도 남는 여분의 곡식을 거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한 편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하시려고 보내신 구원자의 숫자가 몇 명이었으며, 누구였나요?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한 명 밖에 없으신 독자 아들이었습니다. 한 명 밖에 없으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 목숨을 내 주게 하셨으니, 하나님 입장에서는 그런 아들 마져 아끼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내 주신 겁니다.
죄인과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올 수 있게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기꺼이 희생하여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아 부어주신 분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요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사망과 멸망에서 구원해주시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시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에베소서 1:11). 즉, 우리에게 그 분의 나라와 그 안의 모든 보배를 영원한 우리의 유산으로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온갖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에베소서 1:3).
이러한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의 마음을 확인한 바울은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안으시겠습니까?” (로마서 8:32)
흉년이 들어 모든 사람들이 먹을 것이 모자라 허덕이던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는 충분히 먹고도 남아 돌아갈 분량보다 배나 더한 곡식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언제나 후하게 주시고 싶어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물론, 이삭이 체험한 농사의 백 배 수확은 전무후무한 유일한 체험이었습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삭의 백 배 수확과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진리를 증명하는 사건들로써, 특히 믿음의 후대들이 성서에 기록된 이 사건들을 읽으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계획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에게는 이 모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진리를 확신하게 해줍니다.
이삭은 이 놀라운 경험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큰 힘을 얻고 더욱 견고해져서,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가족들을 보호해주시고, 또 어떤 상황에서든지, 모든 필요를 넉넉하게 공급해주시고 보살펴 주실 거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나머지 본문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복을 통하여 매우 부유하게 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 이삭이 거느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지니까, 아비멜렉 왕은 그를 추방하면서, “당신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오” (16절 하) 라고 말합니다.
이삭은 자기를 보호하며 도와주던 사람들이 변해서 이제는 자기를 질투하고 미워하며 내 쫓을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또 그들에게 섭섭하거나 책망하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들을 떠나서 ‘그랄 평원’ 으로 옮겨와서 거기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는 그의 아버지가 예전에 팠던 우물들이 있어서, 그 우물들을 다시 파서 물을 내어 마시고, 짐승들도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들은, 아브라함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이 다 메워 버렸던 것들이라서, 물도 깨끗지 않고 넉넉하지도 못하여, 이삭의 종들은 새로운 우물들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삭은 그 어느 곳을 파도, 샘들이 터지고 물들이 줄기차게 솟아 나왔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삭을 복주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파도 샘줄기를 찾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가뭄을 당한데다가, 우물을 파도 물줄기를 찾지 못하여, 저들이 마실 물은 물론이고, 저들의 가축과 짐승들을 마시울 물이 떨어졌을 테니, 저들의 땅에서 우물을 파서 물줄기를 찾은 이삭의 우물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가로채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럴때마다, 이삭은 자기가 판 우물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들을 저항하거나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기 우물들을 저들 거라며 가로챌 때마다, 이삭은 그냥 그대로 내주고, 새로운 우물을 팔 만한 땅을 찾아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 번째로 판 우물을 ‘르호봇’이라고 이름을 붙혔는데, 이 말은 “넓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유인 즉, 이 우물을 팠을 때는, 그랄 지방 사람들이 더 다투거나 시비를 걸지 않아서, 한 숨을 돌리고, 마음 껏 또는 넉넉히 물을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그랄 지방 사람들은 가뭄의 영향을 받고 점점 더 어려움을 겪고 있고, 우물을 파도, 물을 얻지 못하는 상황인데, 똑같은 땅에서도 이삭은 우물을 파려고 삽질만하면, 쉽게 물줄기를 얻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그를 보살펴주시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고서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다만 이삭이 하나님이 택하신 아브라함의 아들이라서 자동적으로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이라도,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순종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이삭에게 하셨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서 잘 살펴보면, 이삭에게 하신 약속은 분명히 조건부 약속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3절 상).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그가 자기의 독생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즉시 그리고 끝까지 복종하였기 때문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창세기 22:17-18) 고 하신 겁니다.
창세기 18 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러 내려가시면서, 그러한 의도를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고 말씀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은 반드시 그 후손을 잘 가르쳐서,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처럼 되지 않고, 하나님을 순종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는 백성이 되도록 할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며, 땅 위에 있는 나라마다,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19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 (창세기 18:18-19)
19절 마지막 문장을 보십시오. “그(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분명히 조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그 자손이 받을 수 있으려면, 그들은 반드시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하는 것들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읽으면, 무슨 뜻이기도 합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에게서 배운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며 옳지 않고 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어 주시지 않을 거라는 뜻이기도 한 겁니다.
여기까지 살펴 오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본래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인간을 창조하셔서, 모든 피조물이 그분이 만드신 아름답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그분의 선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며 저들도 그 풍성하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혜택을 누리게 해주시고, 특히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이루어 그분을 영화롭게 해드릴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과 이를 위해 필요하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후하게 주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떠나지 않고 겸손히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창조주를 사랑하며 섬길 수 있게 할 명령 한 마디와 이를 거역할 때 반드시 겪게 치루어야 할 일에 대해서 분명하게 일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걸려들어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사랑을 불신하고, 그분의 명령과 경고의 말씀을 멸시하고 먹지 말라고 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음으로써, 죄가 세상으로 들어와서 모든 것을 파괴하게 만들었고,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갈라선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창조 계획과 뜻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을 거역하는 모든 악과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영원히 없애시고, 죄인과 악인들 중에서 그분의 새 창조에 포함시킬 자들을 택하여 부르셔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아담과 하와가 간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로 만들고 계시며, 이들이 영원히 상속받아 일하며 살아갈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이유와 똑 같습니다. 주님의 옛 사도들이 그분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시작한 것도, 바울의 말을 빌리면,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
바울은, 로마서 5 장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여러 각도에서 비교하면서, 이들이 각각 한 행위로 인하여, 아담은 온 세상에 죄와 죽음을 불러들였고,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은혜와 생명이 들어 오게했다고 말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으로,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사망하게 만들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될 수 있게 해주었고, 더 나아가서 판정만 받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합니다.
아담은 자신의 불순종으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자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분의 순종의 발걸음을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예비하고 계신 하늘 나라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상속받는 자들이 되게 해주신 겁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자랑하지 않고, 그 믿음의 순종이라는 행함을 동반하는 살아 있는 믿음인지를 수시로 점검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명령과 말씀과 뜻을 순종하는 열매를 맺으라고 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 . .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 .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14, 17, 20-22, 26).
“아브라함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창세기 17: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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