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06_창18(16-21)_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Jun 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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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을 보십시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 .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하고 계십니다.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브라함 하면, 복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그에게 복을 주시려고 선택하셨다고 대부분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고자 그를 선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서 그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 .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아브라함 개인적으로는, 그의 소유가 될 땅을 주시는 복과 (그의 자손이 하나의 큰 민족과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므로, 그들의 수를 수용할만큼 큰 땅으로서, 오늘날 팔레스타인 전지역을 말합니다.) 그에게 큰 민족이 될만큼 수많은 자손을 허락해 주시는 복, 그리고 아브라함이 높고 큰 명성을 얻는 복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중보와 통로가 되는 복을 말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 .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땅에 사는 모든 민족도, 아브라함처럼 각각 큰 민족을 이루고, 각각 넓은 땅을 차지하고, 각각 자신들의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되는 복을 얻는다는 말일까요?
이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혈통인 이스라엘 사람들 (또는 유태인들) 만 위한 조상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과 모든 이방인들 중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게 되는 사람들의 조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가 복의 통로가 되게 하셔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유대인과 이방인]의 조상이 되었으니” (로마서 4:11).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거라는 말씀도, 이스라엘만 의미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인이 (이 속에는 한국인인 여러분과 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이 나라가 바로 성경에서 자주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왕국인 겁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라는 말은, 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2:11-19에서 설명하며 가르치는 내용이 바로 이겁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17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18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사실 인간은 본래 아담과 하와로부터 나온 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부터 서로 경쟁하고 갈라지면서 남남이 된 겁니다. 멀어지다보니, 인종와 언어와 풍습과 사상까지 크고 다양한 차이를 만들어내었고, 각각 자신의 일과 관심을 다른 이들의 것보다 더 앞세우고 고집하면서, 결국은 오늘날까지 나의 것은 빼앗기지 않고, 남의 것은 빼앗으려는 싸움과 전쟁을 해 오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하고 변질되고 갈라져서 원수가 되어버린 인류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어, 다시 한 가족이 되게 하고 계시는 겁니다. 아담 안에서는 원수가 되었던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서는 한 가족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13 . . .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 . .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 .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서로]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 . . 함께 시민 [또는 ‘하나의 큰 민족]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에베소서 2:13-16, 19).
이렇게 하여,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의 큰 민족을 이루게 되면, 그들이 서고 살 땅은, 현재의 팔레스타인보다 훨씬 더 큰 땅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팔레스타인 지역 땅만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땅을 의미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로마서 4장 13, 16-17절의 의미인겁니다.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또는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 . . 16 . . .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 .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믿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약속하신 것을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13절에, 그것은 바로,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지구 전체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야, 세상 모든 민족들 중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의 큰 수를 다 수용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현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질 세상을 의미합니다.
7 그러나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불사르기 위하여 . . . 보존되고 있으며, 경건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불신자들]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날까지 유지됩니다. . . 10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 . 12 . . .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13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7, 10, 12-13).
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한일서 2:17).
1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1:1-2).
우리 주님께서도 산상 설교를 시작하시면서 팔복을 선언하실 때에, 그 중에서 “온유한 사람”이 [곧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들이나 일들에 대한 미움, 복수심, 분노를 다스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다 맡기고, 악에 대하여 선으로 응하고 이기는 길을 택한 사람들] “땅을 차지할 것이다” 라고 하신 그 땅도 현재의 땅이 아니라, 새 땅을 의미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땅은 팔레스타인 지역 땅을 의미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각 민족 중에서 나올 모든 성도들을 (곧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을 공유할 모든 믿는 이들) 수용할 수 있는 새로워지고 넓어질 세상의 모든 땅을 의미하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오직 새로워진 사람들만 살 수 있습니다. 새로워진 사람들이란 저들의 죄가 사함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새롭게 거듭나서, 새롭고 경건한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고, 이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영원토록 등록해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6절에 의하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에는 세상 모든 민족들 중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그들의 “영광과 명예를 그 도성으로 들여올 것” 이라고 하고 있고, 27절에 의하면, “속된 것은 [모든 죄와 악]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모든 죄인과 악인]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로지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위의 말씀 중에,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 그들의 “영광과 명예를” 하나님의 도성 안으로 들여올 것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이름이 크게 떨치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사람들도 아브라함이 누리는 “영광과 명예를” 누리게 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입각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들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11 . . .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12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11-12).
위의 구절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이름이 모든 성도들에게서 받으실 영광이나,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서 받을 영광은, 동일한 영광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은 어떤 영광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모습으로 완성된 성도들의 모습을 의미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은, 곧 그분의 성품과 삶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어떤 성품을 지니셨고,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예수님의 성품은 곧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 (히브리서 1:3). 그것은 거룩함과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22).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죄성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히브리서 4:15).
예수님은 자신의 식구들과 제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 의해 배신과 버림을 받으시면서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유월전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1). 또한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자기를 배척하고 모욕하며 죽이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위하여 중보기도를 올리시면서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으로,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대속제물로 내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로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위하여 완전히 헌신된 삶이었습니다. “5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 7 ‘보십시오. 하나님! 나를 두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히브리서 10:5, 7). 사람의 아들인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감히 침례를 드릴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드러내신 뜻인 것을 일러주시며, 예수님이나 요한이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시면서, 요한을 설득하여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여시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 속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해서만 사랑하시고 기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어도, 예수님은 그 특권을 누리려고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자신의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아들이 되길 원하셨고, 자신에게서부터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는 억울함과 고통스러운 죽음마져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아버지의 뜻임을 알았기에 기꺼이 순종하신 분입니다.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5:8-10).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걸어가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길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만 걸어야 했던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구원받은 죄인들이 의인으로 사는 법을 보여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1).
베드로는 이 말씀을 하면서, 특히 모욕과 억울함을 당하고 괴로워하고 있던 성도들이 적용할 수 있는 예수님의 본을 말해줍니다.
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24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23-24).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겪는 오해, 멸시, 억울함 등 속에서 끓어 오르는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의 유혹을 다스리며, 용서와 사랑으로 대응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밀고 올라오는 온갖 욕심의 유혹을 다스리며, 절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는 훈련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이 길을 먼저 걸어 가셨습니다.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 . .” (히브리서 5:8).
죄인이 구원을 받아 의인이라 칭함을 얻었으나, 그러한 부르심에 합당한 의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고난이 요구되고, 이것을 요구하시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과 순종의 삶으로 불러 놓기만 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보고 따라서 배울 수 있도록, 그분의 아들의 발자취를 본으로 남겨 놓으신 겁니다.
그리고 고난과 순종의 길을 다 걸어가신 예수님은 “완전하게” (히브리서 5:8)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고난과 그 길을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 들이고 인내하며 순종하는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데살로니가후서 1:11) 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고,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또는 부르신) 목적입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창세기 18:19).
아멘.
이 고난을 잘 견디며 인내하여 정금같이 깨끗하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단단하여 지길 원합니다. 오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 지시길 원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목사님과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