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14_창15(10-12)하나님은 오시지 않고 솔개들만 날아드는데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Mar 14, 2021
- 5 min read
Updated: Mar 19, 2021
“10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11 솔개들이 희생제물의 위에 내려왔으나, 아브람이 쫓아 버렸다. 12 해가 질 무렵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가운데,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본문의 희생제물은 하나님 예배를 위한 제사제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원문에는 ‘희생제물’ 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체’ 라고 부르고 있고, 본문 어디에도 이것들을 제단 위에서 태웠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희생제물들은 어디에 쓰려고 준비한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중요한 언약을 세우시려고, 아브람더러 준비하라고 한 희생제물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는 것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장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의 모든 땅을 아브람이 차지하여 소유권을 갖도록 해주겠다고 7절에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대로, 이 약속은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생일 선물을 주듯 아브람의 손에 쥐어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소유하려면, 싸워서 차지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비로소 가나안의 모든 땅을 얻게 될 때까지 그 땅의 원주민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했던 겁니다. 여호수아기와 사사기 속에 이 전쟁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뜻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 아브람에게는 땅을 얻게 될 기쁨보다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더 크게 다가왔을겁니다. 평화롭고 순조로운 과정을 통해 땅의 소유권이 인수인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숨 걸고 완강하게 싸우며 버틸 원주민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루면서 빼앗아 차지하여 가지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치룬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갈 것이며, 또 얼마나 자주하게 될 것인지, 또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건지 알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싸움을 버텨내고 또 이길 거라는 자신감도 보장도 할 수 없는 일이니, 아브람의 불안과 번뇌는 말할 수 없이 컸을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나님 앞으로 바싹 다가가서, 이 소유권을 위한 대전쟁에서 아브람과 그 자손이 절대적인 승리를 얻게 될거라는 보장과 확증을 하나님께 요구한 겁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창세기 15:8)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 요구에 응하셔서, 그 마음에 절대적인 확신이 설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시고자, 갈대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용증권과 같았던 언약식을 거행하신겁니다. 이것을 창세기 15장 8-21이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언약식에서는 본문 9-10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동물들을 죽이고 몸통 가운데를 쪼갭니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게 하되, 그 중간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공간을 내서 땅에 차려 놓습니다. 이런 식으로 언약을 세우는 것은, 언약을 깨는 자는 조각 난 동물과 같은 운명을 치룬다는 조건 하에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언약은 당사자들이 각각 자신의 생명을 걸고 세우는 언약인 겁니다. 자신의 생명을 잃지 않으려면, 반드시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하는 언약식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언약을 하지 않으셔도, 본래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변덕을 부리지도 않으시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분입니다 (민수기 23:19). 그런데도 하나님이 이 언약식을 거행하신 것은, 아브람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람의 마음에 조금도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더러 이 언약식에 필요한 동물들을 준비해서 가져 오라고 명하시고, 떠나가셨습니다. 이 명령을 하시고 떠나가신 시간은 아마도 늦은 밤이었을 겁니다. 방금 전까지 아브람은 수를 셀 수 없는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 보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으니까요.
대화가 끝난 시간이 밤 중의 몇 시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브람은 잠을 잘 수 없었을 겁니다. 즉시 우리로 달려가서, 세 살 된 집짐승들 중에서 제일 좋은 것들 한 마리씩 암송아지와 암염소와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도 한마리씩 골라낸 다음에, 먼동이 트기 전 하나님께서 명하신 장소로 이끌고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해가 오르기 시작할 때, 그 동물들을 죽여서 언약식을 위해 차려 놓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었을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늦은 오후 시간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이제 곧 해가 질 텐데도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으니, 아브람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도데체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그리고 어떤 이유로 오늘 하기로 한 이 언약식에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으시는 걸까? 아브람은 의아했을 거고, 답답했을 거고, 불안했을 겁니다. 그리고, 실망과 낙심의 계곡으로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었을 겁니다. 약속 시간에 너무 늦어지시는 것에 화도 났을 겁니다. 그러나 해가 질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안나타나시는 것을 보며, 아예 약속을 깨신 하나님에게 배반을 당한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겁니다.
아브람의 속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있었는데, 하루 종일 땅 위에 놓여있던 짐승의 사체에서 나는 냄새를 맡은 솔개들이 멀리서부터 떼를 지어 날아와서는 고기 덩이들 위에 내려 앉으려고 소동을 부립니다. 그러니 아브람에게 시급한 문제와 걱정거리가 더 생긴 겁니다. 사체를 먹기 위해 날아 드는 솔개들을 막는 일은 사자와 같은 맹수들도 하기 힘든 일입니다. 잠간 한 눈 파는 동안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살을 파먹다가, 맹수가 다시 으르렁거리며 달려들면, 후다닥하고 가까운 나무 위로 날아가 앉아 있다가, 맹수가 또 한 눈을 파는 기회가 생기면 순식간에 내려와서 사체의 살을 파먹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예상치 않게 찾아온 이 문제거리는 보통 문제가 아니라, 쉴 새 없이 싸워서 동물의 사체들을 지켜야 하는 솔개와의 사투전이라 할 수 있을만큼 힘겨운 노동입니다.
하나님만 나타나 주시면, 몸과 마음의 고통이 사라질텐데, 해가 넘어가는 시간까지도 나타나시지 않는 하나님이 정말 몹씨 야속하다고 생각되었을 겁니다. 그래도 아브람은 온 힘을 다해 끝까지 솔개들을 쫓았습니다. 해가 질 무렵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노령의 몸은 지칠데로 지치고, 결국 아브람은 눈꺼풀마져 지탱할 힘조차 없어진 상태가 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져 깊이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때 찾아 오셨습니다. 정말 너무 하시지요? 그리고 너무 지친 모습으로 곤히 자고 있는 아브람이 가여웠는지 깨우지 않으시고, 혼자서 언약식을 거행하시고 마치십니다. 마치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여러번 자기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고 하셨는데도,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자고 있는 제자들을 측은히 보시고, 더이상 깨우지 않으시고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 (마태복음 26:45) 하시고, 홀로 기도하시던 장면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아브람은 12절에서 깊은 잠에 빠진 이후로 언약식이 끝날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깊은 잠 중에서도 그의 영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 듣고, 홀로 언약식을 거행하시는 모습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언약 내용을 분명히 알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신 일입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이 땅은 겐 사람과 그니스 사람과 갓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르바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을 다 포함한다’” (창세기 15:17-21).
하나님이 언약식을 거행하실 수 있었던 것은, 동물의 고기 덩이들이 한 점도 찢기거나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또 아브람이 하루종일 온 힘을 다해서 솔개들을 쫓아버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아브람이 솔개를 쫓을 힘이 완전히 빠져 나가서 더이상 쫓지 못하게 되니까,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하루 종일 기다리게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훈련하시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믿음의 시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따라 노동하고 수고한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신다는 겁니다.
해 아래 인간이 계획하고 행한 것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들은 모두 헛되다는 결론을 내린 전도자는,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들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전도서 12:13). 바울도 같은 사실을 증언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8, 개역개정).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11절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고, 오랜 시간 낙심하지 않고 그분의 뜻과 명령을 따르며,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아브람의 후손은 훗날 이집트에서 400년의 길고 고된 종살이를 한 후에 이 사실을 체험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이들의 조상을 통해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밤잠도 못자고 새벽부터 해가질 때까지 먹지도 쉬지도 못한 채 솔개들을 쫓아 버리며 하나님을 기다리던 이 날 하루의 심신의 고통과 노동은 90을 바라보는 노인의 몸으로 감당하기에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 쓰러져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날 하루의 괴롬과 고통은 아브람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요 시련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보상해주셨습니다.
훗날 아브람의 후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의 길고 긴 고난의 종살이를 하는 동안, 조상 아브람이 겪고 배운 이 날의 교훈과 증거를 기억하며, 저들의 출애굽과 가나안 땅을 정복할 날이 올 것을 확신하며, 이집트의 고난의 시간들을 견딜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고, 오랜 시간 낙심하지 않고 그분의 뜻과 명령을 따르며,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이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 아멘.
아멘! 아멘 입니다. 생명의, 능력의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지치고 아무것도 할수 없을때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체험하며 살고 있음을 간증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하시고 기뻐 하시는 주의종을 만나게 해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림니다. 이렇게 능력과 독수리 같이 솟구치는 믿음의 소망과 위로,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을 나타내시는 자상하신 귀한 말씀 설교를 어디에서 들을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