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21_창15(1)두려움과 불안에 빠져있는 믿음의 조상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Feb 21, 2021
- 6 min read
미국 전역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률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먹구름이 점점 거둬지는 것 같아 마음이 설레기까지 하네요. 희망의 빛이 보이니, 인생들에게 자비를 보여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대로 감염률이 줄어간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는 좀 안심하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세상이 결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지요. 걱정거리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숨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그런데 걱정거리들이 순서대로 하나씩만 생기면 그래도 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종종 걱정거리들과 불안한 일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찾아 오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도 우리와 같은 현실 속에서 자신과 식구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간절히 바래오던 일도 더이상 바랄 수 있을만한 가능성 마저 완전히 없어진 현실에서 오는 절망감이 겹쳐진 상태에서 여러 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1절을 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첫마디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니, 아브람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던게 분명한 거지요.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대신에 힌트를 줍니다. 그 힌트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라는 말들 속에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14장에서 본 일들입니다. 14장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까?
아브람은 자신의 목숨을 빼앗길 수 있었던 위험한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다행히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 전쟁에 빨려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자기 조카 롯이 사로잡혀서 끌려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싸운 적들은 당시 가나안 모든 지역의 왕들과 사해 동쪽의 모든 왕들도 당해내지 못했던 막강한 동방 4개국 연합군이었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수량의 군인과 무기를 갖추고 있었던 병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은 불과 318명의 집안 하인들하고 몇 안되는 이웃들과 함께 쫓아가서 그들을 쳐부수고 가나안 지역 밖으로 쫓아버렸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 오로지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보호하시고 도우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롯과 그의 재산, 그리고 롯과 함께 잡혀갔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재산을 모두 되찾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기쁨과 안도감은 며칠 못가서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승리가 영구적일거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싸움에서 패배했지만,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다시 병력을 보강하여 더 강한 힘을 갖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일이 현실이 된다면, 아브람은 하나님이 또 다시 보호하시고 도와주시지 않는 한, 그돌라오멜의 보복을 힘없이 당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을 대적하며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재앙과 패망]를 내릴 것이다”(창 12:3) 라고 이미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사실 아브람이 그 막강한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말도 되지 않는 318명의 적은 수의 집안 하인들의 힘으로 쳐부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과 또 그 약속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생각했다면, 오늘 본문에서 보이고 있는 것과 같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아브람은 만일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이 다시 쳐들어 온다면, 홀로 그를 대적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 전쟁에서는 용맹스럽게 싸워서 이겼던 사람이, 지금 머리 속에서 상상하고 있는 전쟁에서는 벌써 패해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만일 정말 아브람이 홀로 싸운다면, 당연히 상상한대로 패배할겁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아브람의 모습과 생각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기억에서 놓치면, 다시 나의 옛 사고방식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옛 사고 방식이란 어떤 것입니까? 나는 혼자라는 생각. 내 생각대로 생각하고, 내 힘으로 해내고, 나 혼자서 다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언제만 기억하나요? 성탄절이 되어야 비로소 오랜만에 읽어보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믿는다고 하지요. 성탄절이 지나면, 그리고 성탄절이 다시 오기까지 임마누엘은 우리의 기억과 생각과 믿음에서 멀리 떠납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보내드립니다. 왜요? 내가 다시 내 자신과 생각하고 계획하며 모든 걸 다 내 힘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겨나서 숨쉬고 움직이고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살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살아 움직이게 해주시기 때문에 살고 있는 건데 말입니다. 바울도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8). 하나님은 믿는 자들과는 더 가까이 계시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사도행전 17:27) 있을 만큼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그분이 부르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은 사람들과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시고, 그들과 항상 함께 계시며[“임마누엘”], 그들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야곱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벼르는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 가던 중,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택하시고 복을 주시려고 부르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창세기 28:15)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사람은 영원히 지켜 주시고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모세도 증언하였습니다. 모세는 숨을 거두기 전에 여호수아를 자기의 후계자로 세우고서, 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할 일을 맡기면서, 그들의 마음에 믿음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말을 백성에게 먼저 이렇게 했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대로 그들에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용기를 내십시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말고 무서워하지도 마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가시면서, 당신들을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입니다”(신명기 31:5-6).
모세는 여호수아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용기를 내시오. 그대는, 주님께서 그대의 조상에게 주시기로 맹세하신 땅으로 이 백성과 함께 가서, 그들이 그 땅을 유산으로 얻게 하시오. 주님께서 친히 그대 앞에서 가시며, 그대와 함께 계시며, 그대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도 말고 겁내지도 마시오”(31:7-8).
모세와 바울은 이 사실을 수도 없이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부터 모든 상황 속에서도 자기를 떠나지 않으시고 보호해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힘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과 사랑을 수도 없이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바울은 위에서 한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한 말은 만들어 낸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체험의 증언이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고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과 반드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신 것을 이들은 체험해서 확인했기 때문에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분은 어떤 일도 염려할 것이 아님을 깨달았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아뢰면, 하나님의 평화가 그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었고, 그 평화의 하나님이 그와 늘 함께 하시는 걸 보여주셨고, 또 어떤 처지와 경우에서도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못해낸 것이 없었고, 그 어떤 역경과 위험 속에서도 그를 사랑하여 주신 하나님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았을 뿐만 아니라,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도 다 마칠 수 있는 가운데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고 간증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아직은 이러한 체험을 깊이 하지 못한 아브람이, 두려움과 불안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비교적 미숙한 믿음이었던 아브람을, 우리는 이미 창세기 12:10-20에서 보았고, 또 앞으로 창세기 20장에서도 보게 됩니다. 아브람은 좀 더 강하고 성숙한 믿음을 갖기 전까지는,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상황을 접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함과 용기를 갖기 보다, 자기 생각과 꾀를 더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세기는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의 굴곡을 사실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우리의 믿음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한 때는 병자도 낫게 한 믿음의 기도를 올렸다가도, 시련의 고통이 길고 깊어지면, 믿음의 생각과 시각을 가지기 보다는 이런 어려움을 막아 주시지도 않고, 또 어서 헤어나게 해주시지도 않는 하나님에 대해 서운해 하고, 마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갖는 생각과 감정으로 깊이 빠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조상도, 마침내 견고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어떤 상황과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고, 담대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숙한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믿음의 봉우리와 계곡 사이를 수없이 올랐다 떨어지는 과정을 겪은 사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위안을 받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여러분과 저도 불안하고 위험한 시간들 속에서도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나의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지켜 주시며 도우시는 분인 것을 믿고, 두려움과 불안을 버릴 수 있게 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한 가지만 더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두려움 속에 빠져서 생각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던 아브람이 다시 바른 생각과 믿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아브람에게 다가 온 “여호와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1절 첫 부분을 다시 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 뒤에,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한국어 새번역이 오늘 본문을 원어가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를 약화시켜서 번역한 아쉽습니다만, 원어 문장에서는 단어들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에, 오셨다, 말씀이, 주님의, 아브람에게, 환상 속에서.”
새번역은,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원어에는 “주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오셨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새번역에 의하면 주어가 ‘주님’입니다. 그러나 원어 문장에서는 주어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원어에서는 주님의 말씀에 초점을 두면서, 두려움 속에 빠져 있던 아브람을 건져낸 것이 ‘주님’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새 번역대로 오늘 본문을 읽으면, 아브람이 두려움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주님이 환상 가운데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원어의 의도대로 읽으면, 아브람이 두려움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오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새번역은 자칫하면, 우리의 관심이 환상에 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환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고 믿고, 우리도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환상과 같은 신비로운 영적체험 속에서 하나님을 봐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는 아브람의 두려움을 잠재운 것은 그를 찾아 온 주님의 말씀이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메시지는, 아브람이 두려움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두려움에 빠져 있던 아브람의 연약해진 마음에 다시 믿음과 용기와 소망을 불어 넣어 준 힘은 신비로운 환상 체험 자체에 있었던게 아니라, 그 가운데서 아브람을 찾아 온 주님의 말씀 안에 있었던 겁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가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억해야 할 중요한 이유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운 능력과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착각과 오해를 바로 잡아 줍니다. 우리가 무지함 속에서 듣고 읽고 본 것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생각들 속에서 비진리와 거짓들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진리를 밝혀주고 이해하게 해줍니다. 특히 우리가 매일 우리도 모르게 갖는 부정적이고 불신적이고 어리석은 생각들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7 주님의 교훈은 완전하여서 사람에게 생기를 북돋우어 주고,
주님의 증거는 참되어서 어리석은 자를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교훈은 정직하여서 마음에 기쁨을 안겨 주고,
주님의 계명은 순수하여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9 주님의 말씀은 티 없이 맑아서 영원토록 견고히 서 있으며,
주님의 법규는 참되어서 한결같이 바르다.
10 주님의 교훈은 금보다, 순금보다 더 탐스럽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다.
11 그러므로 주님의 종이 그 교훈으로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상을 받을 것이다.
(시편 19편)
아멘!
아멘 아멘 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수 없는것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고 행하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정말 말씀을 떠나선 서 있을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음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다시금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확인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