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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7_성탄절(04)_마1(13-23)_우리의 유일한 소망, 하나님의 아들 예수

  • Writer: 전재균목사 (Pastor Chun)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Dec 27, 2020
  • 10 min read

오늘로써 예수님 탄생에 관련한 설교를 다 마치게 됩니다. 올 해의 성탄절 설교는 마태복음 1장과 2장을 본문으로 삼고, 12월 첫째 주일(6일)부터 마지막 주일인 오늘(27일)까지 4 번에 걸쳐서 하는 중입니다.


첫째 주일은(마태복음 1:1-17),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두 인물의 자손이라는 사실은, 예수께서 유대인 혈통을 가진 분인 것을 증명합니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요한복음서 4:22)에 구원자로 오실 예수님은 유대인 이어야 했던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유대인만 아니라, 온 땅의 모든 민족에게도 영생과 풍성한 삶의 복을 얻는 것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 의해 이루어질거라고 창세기 12장 1-3절 그리고 창세기 22장 17-18절의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사무엘하 7장 12-16절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이어받고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릴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와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먼 옛적부터 인류를 위한 구원자와 참된 목자(왕)를 주시겠노라고 약속하신대로 지키신 일이요,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진정하고 신실하신 사랑을 입증하는 일인 겁니다.


둘째 주일에는(마태복음 1:18-25),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창조 전부터 세우신 것과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여 거룩하고 흠없는 의인으로 만드셔서, 새롭고 거룩해진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실 계획을 옛적부터 세우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예수’(구원자)라는 이름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임을 배웠습니다.


셋째 주일에는(마태복음 2:1-12), 모든 민족 중에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자들을 구원하시고 다스릴 만민의 구주요 왕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실 장소로 (유다의 여러 마을들 중에서 가장 작은 마을) 택하신 곳을 보며, 온 세상을 평화로운 가운데 영원토록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은 겸손과 섬김과 희생적 사랑에서 나오며,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기뻐하시고 가장 높은 지위로 올리시는 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마태복음 2:13-23),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그를 죽이려는 흉악한 왕의 칼을 피해 도망가셔야 했던 상황과 이 때 아기 예수와 같은 나이 또래로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살 미만의 모든 사내 아이가 흉악한 헤롯 왕의 칼에 죽임을 당하여 많은 부모들이 비통하게 울부짖는 사건을 보면서,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꼭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이유들을 함께 찾아 보려고 합니다. (결론 부분에서 계시록 5장 인용).


동방의 박사들이 특이한 별을 보고서, 유대인 땅에 위대하고 높은 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별임을 깨닫고, 먼 길을 여행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왕께 인사를 올리러 왔다고 하면서 왕궁의 문을 두드렸을 때, 헤롯 왕과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은 당황하며 떨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헤롯은 합법적인 유대인의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헤롯과 함께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던 고관들은 헤롯이 왕 위에 앉을 수 있도록 부정 수단으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을 이들 덕에 왕이 되었고, 왕이 된 헤롯은 이들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권력과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얻도록 해줌으로 이들의 공로를 보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합법적인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은 청천의 벽력과 같은 두렵고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순순히 왕좌를 내 주고, 물러갈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과 그 일당은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그 아기를 찾아서 없앨 계획을 세웁니다.


그래서 이들은 박사들이 저들의 계획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고,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합니다. “가서, 그 아기를 . . .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에게 인사를 올릴 생각이오.” 박사들은 왕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내려가서 아기 예수를 찾았고, 그에게 보화를 드리고 경배하며 인사를 올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꿈으로 그들에게 경고하셔서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고, 박사들은 그 즉시 다른 길로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박사들이 떠나자마자 주님의 천사는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어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가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요셉은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갔는데, “헤롯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 저자는 이 일이 호세아 선지자가 11장 1절에서 예언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호세아]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마태복음서 2:15).


아기 예수께서 헤롯 왕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고 이집트로 피신한 일이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이루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담고 있는 일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세아 11장에서 말씀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호세아 11장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신 일과 그 후의 이스라엘이 솔로몬 시대 후에 북왕국(‘이스라엘’ 또는 ‘에브라임’이라고 불림)과 남왕국(유다라고 불림)으로 갈라져서 두 나라가 될 때까지의 일을 회상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11장은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그러나 내가 부르면 부를 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던 저들을 사랑하시고, 이들을 자신의 ‘아들’로 여기시고 이집트에서 불러내셔서,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를 기대하셨는데, 저들은 결국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짧은 2절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실망과 깊은 슬픔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복음서 저자는 이 호세아 11장 1-2절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실망과 슬픔만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서 저자는 서슴치 않고 이 말씀을 아기 예수의 현실과 연결시킨겁니다. 옛 이스라엘이나 아기 예수나 이집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옵니다. 그러나 둘의 반응은 크게 다릅니다. 옛 이스라엘은 자기를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신실하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700 여년 전에는 자기 아들로 삼으셔서 이집트에서 불러내셨던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자기를 배반하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시면서 큰 실망과 깊은 슬픔이 담긴 한숨과 함께 말씀하시던 그 말씀 속에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할 수 없고 또 하지도 못했던 일을 자신의 외아들은 세상에 와서 이루어내리라는 확신과 소망도 담으셨던 겁니다.


마태복음서 저자가 인용한 호세아 11장 1절은 사실 예언적인 성격과 의미를 띈 말씀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말씀은 예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실망과 아픔이 담겨져 있는 한숨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렇게만 보이던 말씀 속에 우리가 미쳐 몰랐던 하나님의 꿈이 담겨져 있는 사실을 예언하는 말씀이기도 한 것을, 마태복음서 저자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보여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처럼, 기대했던 일이 안되면 그것으로 실망하고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르신 분이십니다. 계획하시고 세우신 뜻은 그 어떤 반대와 실망을 겪더래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고, 자신의 꿈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버리시는 분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도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으라고 하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태어나셨고, 옛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늘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이 되셨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일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겸손히 행하며 순종한 일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이를 보시던 아버지께서는 요단강 물에서 나오시는 예수님을 가리키시면서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치셨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 바로 이런 기쁨의 환성을 옛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내시고 싶으셨으나, 그럴 수 없으셨고, 오히려 깊은 한숨을 내쉬시며 “이스라엘이 어린 아이일 때에, 내가 그를 사랑하여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냈”었건만 . . . 내가 부르면 부를 수록, 이스라엘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만 갔다늘 말씀 밖에는 다른 말씀이 나오지 않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외아들께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 드리셨던 겁니다. 그는 자신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주신 아버지에게 실망을 드리지 않은 아들이셨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순종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최고의 영광과 명예와 지위로 상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빌립보서 2:6-9).


그리고, 하나님은 이 외아들을 우리에게 본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께서 가신 길은 곧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우리도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께서 품으신 마음은 곧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친 겁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것은 어둡고 악한 세상과 죄의 삶에서 불러내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의 아들과 딸들도 거룩하여 깨끗하고 흠이 없는 자들이 되게 하시려고 불러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것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베드로전서 2:9-10).


사실 이 외에도 이집트에서 자기 아들을 불러냈다는 말씀 속에는 여러분과 더 나누고 싶은 진리가 있지만, 오늘은 이 것까지만 나누고, 더 나누고 싶은 것들은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16-18절을 함께 묵상하며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6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박사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아 차린 헤롯 왕은 분노를 터뜨리고, 부하들을 보내서 “박사들에게 알아 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 아이를 모조리” 죽이게 합니다. 참으로 끔찍한 사건입니다. 밤낮 젖을 물리며 애지중지 키우고 있는 자기의 어린 아들을 바로 자기 눈 앞에서 칼로 베어 죽여버리다니! 이 일을 당한 어머니들의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서 저자에게 감동을 주셔서, 이 사건과 600 여년 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한 쓰라린 역사와 연관시켜 주십니다. 예레미야가 사역하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여 나라와 땅을 잃고, 남은 유다 백성은 모두 바벨로니아의 포로가 되어 잡혀가던 때입니다.


바벨로니아의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유다에 남은 모든 백성 중에 주로 유능하고 젊은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들을 바벨론을 향해 행진시키기 전에 일단 전국에서 모은 사람들을 라마라고 하는 마을에 집합 시켜 놓았습니다(예레마야서 40:1). 라마와 아주 가까운 곳에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셀사라는 장소가 있습니다(사무엘상 10:2).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모든 젊은이와 유능한 사람들이 라마로 모집된 후에 거기서부터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과 슬픔에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애곡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통함을 라마와 가까운 셀사의 무덤 속에 누워있는 라헬이 자기 후손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저들이 다시는 돌아오질 못할 자녀들이라 생각하고 비통하게 울부짖는 것으로 비유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예레미야서 31장 15절의 내용입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슬피 우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600 년 전에 경험했던 이 비통한 사건이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지역에서 살던 두 살 미만의 사내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어머니의 현실 속에서 재현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구하시고 더 풍성한 삶을 주시려 오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자마자 이 귀한 어린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을 왜 막아주실 수 없으신 걸까요? 이 귀한 어린 생명들은 꼭 이렇게 죽임을 당했어야만 한걸까요? 그 어머니들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꼭 당했어야만 한 걸까요? 600년 전의 그 쓰라리고 아팠던 이스라엘의 경험이 600년 후에 또다시 재현되었어야만 한 걸까요?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경멸하고 혐오하고 싶은 하나님의 구원 수단같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의 저자가 인용한 예레미야서 31장 15절의 문맥을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31장 15절만 기록해놓은게 아닙니다. 16절과 17절을 함께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래에 15절부터 17절을 다 같이 다시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15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16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17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15절을 16-17절과 같이 읽어야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16-17절의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 15절로 시작한 것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보시고, 함께 울며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였던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두 자매의 슬픔을 함께 느끼시며, 그 뜨거운 눈물을 함께 흘리셨던 우리 주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눈물을 다 흘리신 후에 무덤 속에 누워 있던 나사로를 살려서 불러내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의 고통과 슬픔과 눈물을 함께 나누시던 하나님도, 그것으로만 그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나아가서, 자기 백성의 고통을 완전히 치료해주시고, 그 슬픔을 진정으로 위로해주시고, 그 눈물을 깨끗이 닦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이 느끼는 마음의 고통 중에서 자기 살덩이와 같은 자식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 말고 어느 것이 있겠습니까? 또 인간이 일평생 모든 시간과 정열을 쏟으며 노동한 것이 결국은 헛수고와 헛고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보다 더 허탈하고 허무한 것이 어느 것이 있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가장 보람되다고 생각한 업적이라고 여겼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따른 것이면, 결국 그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영원한 후회 속에서 이를 갈며 통곡하게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들과 연관된 우리의 욕심을 따른 사람들과 그들이 얻은 것들과 추구한 것들의 결국이 어떤 것이 되는 지를 아래에서와 같이 경고했습니다.


“15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일서 2장).


사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외에 모든 다른 것과 사람까지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거나 하나님 못지 않게 중요한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입에 달고 다니지만, 마음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아야,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과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그것들도 영원히 빼앗기고 하나님도 잃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하나님은 무자비하시다 할 만큼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여서 번제물로 바치라고까지 하신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애지중지하게 품고 살았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던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염려되시고 불안해지시는 변화가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속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가, 결국은 그들을 패망하게 만든 변화랑 같은 거였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따르고 순종했어야 할 마음들 속에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도 자기 외아들 이삭이 점점 더 하나님을 그 마음에서부터 밀어내고 있는 변화가 분명히 자리를 잡아 가는데도 아브라함 자신은 그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은 자칫하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벼랑 끝까지 가 있었던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아브라함의 마음으로부터 이삭을 잘라내시는 수술을 시도하시고자 메스를 집어 드셔야만 했던 겁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그 분 외에 다른 대상도 의지와 소망과 기쁨과 위로와 행복의 대상으로 같이 삼으려는 마음에는 결국 실망과 아픔만 남게 되고, 그 입에서는 슬픈 소리와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만 나오게 됩니다.


오로지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그 분 한 분만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모시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그리고 혈육과 자식과 부모와 형제와 친구까지도 하나님 이상으로나 하나님 못지 않는 중요한 의지와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욕심과 생각, 그리고 우리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 하나님 이하로 내려 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려놓았던 것들을 다시 돌려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믿고 인정하실 수 있는 지를 보시면서 결정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붙어 있고, 그분 한 분만이 나의 영원한 소망과 기쁨의 대상과 이유가 되시고, 그분 한 분만이 나의 영혼을 영원토록 맡기는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을 주님이 아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다시 우리의 삶을, 우리의 부모와 형제와 자식을, 그리고 그분의 뜻과 영광을 맡기실 수 있으실 겁니다.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자식마져 다 잃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배반하며 살아온 것을 진정으로 뉘우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라헬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위로의 말씀과 소망을 약속하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 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회개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네가 영원히 잃었다고 생각한 모든 소중한 것들이) 고향 땅으로(네 마음과 네 삶에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서 31:16-17).


오늘 본문에 입각해서 함께 생각해 본 것에 대해 결론을 내려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세상과 죄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면서 그분을 닮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해주시려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어리석은 욕심을 따라 살면서 결국은 모든 소중한 것들을 다 잃게 되고, 우리의 모든 수고가 결국은 헛된 수고가 되는 것이 되지 않게 해주시기 위해 오신 겁니다.


올 해도 저물어 가네요. 새 해가 오고 있습니다. 주님이 허락해주시면, 새 해에도 여러분을 가족들과 함께 건강하게 해주시고, 하시는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많은 선한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복을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길 빕니다. 그래서 저의 기도는 이를 위하여 여러분과 제가 새 해에는 더욱 더 힘써 오로지 하나님과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삼고, 다른 모든 우상을 멀리하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겁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은 우상을 멀리하십시오”(요한일서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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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30_창29(1-14)_동방의 육친들

야곱은 자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은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는 말을 듣고 급히 짐을 챙겨서 아버지 집을 떠나서 먼 밧단 아람 땅에 계신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지금까지 편함과 풍요와 행복을 제공해주었던 아버지 집이, 자기를...

 
 
 

1 Comment


ds031059
Dec 29, 2020

아멘! 폭넓게 가르쳐 주시고 깨우쳐 주시고저 애쓰시고 힘쓰시는 목사님 감사합니다.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서 귀한 말씀이 내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길 원합니다. 귀한 주의종을 주신 자상하신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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