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2_창12:9-13:1_믿음과 순종의 훈련
- 전재균목사 (Pastor Chun)
- Nov 22, 2020
- 7 min read
아브람이 그의 고향을 떠난 후 지금까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모두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향 (갈대아 땅)에 있을 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창세기 12:1-3). 가나안 땅에 도착한 후: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창세기 12:7).
그렇게 긴 말씀은 아니지만, 그 내용을 분석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하나님의 약속: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3) 세상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아브람의 사명: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따라 그분이 가라고 하신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오기까지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온전하게 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살고 있는 땅과 . . . 태어난 곳을” 떠나라는 말씀은 순종하였지만, 고향을 떠나 올 때, 같이 따라 나서는 아버지와 조카 롯은 뗄 수 없었습니다. 50%는 순종하면서, 50%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가는 방향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시고 참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갈대아 땅과 가나안 땅의 중간 쯤 되는 하란이라는 곳에 이르러서는 아버지의 강요로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그 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가 하란에서 눈을 감으십니다.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나서야 다시 가나안 땅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 때도 조카 롯은 여전히 아브람을 따라 나섭니다. 롯이 아브람을 따라오는 한 그는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직은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심으로 자동적으로 아브람이 아버지를 떠난 상태가 되었지만, 사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생명을 객지에서 거두어가심으로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우리가 자원해서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루실 때가 있는데, 이 때 우리는 고통스러운 값을 지불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드디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 주신다고 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이제 아브람은 이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이 땅에서 짐을 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곳에 심한 기근이 찾아 왔습니다. 약속의 땅이요 하나님이 주실 선물의 땅이라 생각했는데, 그곳에 찾아 온 심한 기근을 보면서, 아브람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쪽에 있는 이집트에는 기근이 없고, 식량이 풍족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집트는 나일 강 덕에 기근을 피할 수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아브람에게 이집트 땅처럼 더 좋은 땅을 약속하지 않으시고, 척박하고 기근이 자주드는 물없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걸까요?
기근이 길어질 수록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 대한 실망이 커갔을테고, 물이 넉넉하고 기름진 이집트 땅을 동경하는 마음이 늘어 갔을 거라 생각됩니다. 마침내 아브람은 끝이 안보이는 기근 속에서 지쳐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근이 지나갈 때까지 “이집트에서 . . . 몸붙여서 살려고” 그리고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브람의 모습을 보면서 유심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집트는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은 가나안 땅을 떠나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는 것은 아브람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보여주겠다고 한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도 가나안 땅입니다. 아브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나안 땅을 떠나면 안되었던 사람인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삭 때에도 기근으로 그를 시험하셨을 때, 이삭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창세기 26:1-3).
이 말씀에 의하면, 아브람은 그가 살고 있던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왔어도, 하나님이 보살펴 주실 것을 믿고, 그 땅을 떠나지 말고 머물러 있었어야 했던 겁니다. 안타깝게도 아브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이집트로 내려갔던 겁니다.
만일 이 때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그분의 뜻을 여쭈어 보기라도 했다면,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보여주셨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러한 결정을 하나님과 상의함 없이 자기 혼자 내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겜 땅을 밟았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고 땅을 약속하시는 말씀을 들려주신 경험이 생생하였을 텐데. 그 후 베델 근처 산간지방으로 옮겨 온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으며 주님과 친밀히 교제하던 아브람이, 기근을 만나면서부터는 생각하는 것이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시각으로 빠져 버렸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대한 실망과 그런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많이 줄어든 것을 봅니다.
이게 바로 타락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의 약점입니다. 아니, 인간은 타락하기 전부터 간교한 뱀의 속삼임에 귀를 기울이다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의 모든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후하게 주신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한 그루의 과일을 금하신 것에만 생각이 꽂혀서 불만을 품기 시작하더니, 그것 하나를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해 불신을 품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명을 무시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고 타락한 조상의 후예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에 대해 만족하거나 감사할 줄 모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노예가 되어 허락지 않은 것들과 해서는 안되는 것들, 그리고 가져서는 안되는 것들에 눈과 귀와 마음이 꽂이는 취약점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약점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아브람도 기근의 고통 밑에서 생각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을 때 이 연약함에 빠졌던 겁니다. 그래서 떠나서는 안되는 약속의 땅을 떠났고, 가서는 안되는 이집트 땅 안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우리도 종종 이렇지 않습니까? 큰 어려움이 없을 때는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기까지 하다가도, 감당하기 어렵고 힘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고 기다리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내 생각과 느낌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찾아 온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불만을 품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거나 풀리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 자신의 성품이 악해지고 말과 행동이 어리석어집니다.
만일 우리가 어렵고 힘든 상황이 올 때마다 이런 식으로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믿음의 힘줄이 아직도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재난을 당할 때에 낙심하는 것은, 너의 [믿음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잠언서 24:10).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모습이면, 이제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분발해야 합니다. 재난을 당하면, 더이상 낙심하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된 믿음으로 대응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도우심을 힘입고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게 할 수 있는 강하고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힘쓰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은 우리가 항상 깨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 오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과 고통과 시련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훈련을 쌓으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바로 이런 시간들이 우리의 믿음이 그 실력을 발휘할 때이며, 믿음이 더 강하고 지혜롭고 성숙하게 만들어지는 훈련의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야고보서 1:2-4,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히브리서 12:11-13,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아브람이 기근을 당하여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었을 때, 위의 말씀들을 알고 따랐다면, 다른 행동과 모습을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아브람 당시에는 기록된 성경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가 저들의 미숙한 믿음과 어리석은 생각을 따르면 겪게 될 위험과 고통을 직접 맛보게 하심으로서 저들이 믿음이 지혜를 얻고 성숙해 가도록 훈련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그분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구하지 않고 자기 생각 이집트로 내려가는 동안에 침묵을 지키고 보셨습니다. 아브람은 이집트가 가까워질 수록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아내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큼 빼어난 미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이집트 사람들이 사래가 자기의 아내인 것을 알면, 자기를 죽이고 사래는 살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으면, 마음의 평안을 가질 수 없고, 불안과 두려움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는 겁니다.
아브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부르거나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아내와 함께 궁리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합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해서 저들 손으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리는 애처로운 모습과 흡사합니다.
드디어 아브람은 아내에게 말합니다. 만일 이집트 사람이 사래에게 호감을 갖고 아내로 삼고자 한다면, 남편인 자기를 죽이고 사래를 데려갈테니, 이집트에 가서 사는 동안은 두 사람이 남매간이라고 알려서, 자기가 말하여, 아브람이 목숨을 잃게 되니 않도록 하자고 서로 생각을 모읍니다.
아내를 빼앗기게 되면 빼앗기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있는 사래와 아브람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도, 계획하신 일도 아닙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이런 상황에 빠져 있는 모습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지요.
아브람과 사래는 여차 하면 이 방법으로 아브람의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길 바랬지만, 이집트 남자들이 제발 사래에게 눈을 두지 않기를 바라며 문안하게 지낼 수 있기를 더 바랬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집트 땅을 밟기가 무섭게 사래의 미모가 이집트 사람들의 눈에 들어 왔고, 결국 바로 왕은 사래를 자기 아내로 데려 가려고 아브람을 찾아왔습니다.
마음이 있는데로 졸았을 두 사람은 저들이 남매라고 거짓말을 했고, 바로는 아브람에게 후한 예물로 보상하고 사래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리 미리 마음을 준비하고 있었어도, 막상 일을 당하며 두 사람은 얼마나 놀래고 당혹스러웠을까를 상상해 보십시오. 더더욱 찢어지는 마음의 고통과 한탄스러움을 밖으로 터뜨리지는 못하고, 태연스럽게 행복한 표정을 지어서 감추면서 멀어져가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바로와 이집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의 눈물을 떨구고 있는 노부부의 괴로움은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끝까지 침묵하시고 방관만 하실 것 같던 하나님이 드디어 개입해 주십니다. 바로와 사래가 동침할 수 없게 막으십니다. 그리고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시고, 사래와 아브람의 관계의 진실을 바로에게 알리십니다. 바로는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서 아브람을 급히 불러 호통을 치고 꾸짖습니다.
사래와 아브람은 바로와 그 신하들과 모든 이집트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도 한마디 할 수 없었을 정도로 부끄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보다 두 사람은 그 날 바로의 진노의 칼에 목이 달아날 수 있다는 무서운 현실 앞에 몹씨 두렵고 떨렸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인하여 바로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또 이들에게 후히 주었던 예물도 도로 빼앗지 않고, 두 사람을 당장 이집트 밖으로 나가라고 내쫓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보호해주지 않으셨다면 살아 남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이집트를 떠나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던 일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의 후손을 통해서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시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각각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중요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그분의 구원의 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한 명이든 만 명이든, 그들의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있어야 하고 그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신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자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2 주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집트로 가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살라고 한 이 땅에서 살아라. 3 네가 이 땅에서 살아야, 내가 너를 보살피고,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약속을 이루어서, 4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하겠다” (창세기 26:2-3).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 오늘도 목사님을 통해 제게 귀한 말씀 주시고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말씀을 통해 붙들어 주시고 희망과 소망을 불어 넣어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 드리며 평강의 주님을 높여 드립니다! 중간은 없다! 의 풀이를 설교말씀 속에서 찾게 해주셔 또한 감사드림니다!